꼬꼬무 64회 차에서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과정에서 위기에 처했던
한국대사관 외교관 및 교민 등 150여 명 한인들이 겪은 9일 동안
극적인 탈출과정을 다룰 것으로 보입니다.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한국 교민들과 공관원들의
베트남 마지막 탈출을 다룬 '그날'
목숨을 걸고 교민 탈출을 돕고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함께 정리해 보았습니다.
1975 사이공 마지막 탈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손을 떼고
전쟁의 양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굳어지더니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찌민시) 함락과 함께
남베트남이 패망하게 됩니다.
이날 우리 현대사에서도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당시 베트남에
남아있던 한국 대사관내 외교관과 교민 1509여 명이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퇴로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미국의 최후 작전명 '프리퀀트 윈드'에 따라
미군 헬기로 탈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
장장 19시간에 걸쳐 81대의 헬리콥터로 사이공 전역에 흩여져 있는
미국인, 나민들을 항공모함까지 실어 나르는 이 작전으로 미국 외교관과
민간인 2619명은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공관원의 절반 가량과 상당수 교민은 탈출에 실패했고
그중 일부는 육로로 탈출을 감행하며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
보트피플(월남의 패망을 전후로 해로를 통해 탈출한 베트남 난민)에 섞여
겨우 탈출에 성공하거나 그대로 현지에 남아 살아가야 했고
나머지는 패망 이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겨우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베트남 당국은
적성국이었던 우리 외교관중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2등 서기관, 서병호 주재관 등 우리 공관원
3명을 혁명방해 혐의로 체포하게 됩니다.
이들은 총살형 위협 속에서 형무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면서 가이따우(인간개조)를 시도당했으나
완강히 버티어 수감 297일 만인 1976년 7월 27일
처음으로 일광욕 15분이 허용될 정도의 참담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치화형무소 격리 감방에 있는 수감자에게는
하루 2리터의 끓인 식수를 급수하게 되어있는데
나쁜 간수들은 정량의 반정도만 떠주기도 했고
수감기간 동안 단 한 번의 면회도 이뤄지지 않은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곳에서 지내야 했답니다.
이 때문에 이대용 공사는 수감 1년 만에 체중이 78kg에서
46kg으로 줄어들고 스스로목숨을 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절망감 속
피폐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후로도 베트남 정부는 같은 공산국가였던 북한의 완강한 반대로
이들을 석방하지 않았고
프랑스 외교부가 한국 내에 수감 중인 북한 간첩과 맞교환을 제안하면서
프랑스의 중재로 북한 측과 교섭까지 진행되어
북한은 우리 정부가 석방할 간첩 명단과 석방조건까지
요구한 했지만
교환협상이 끝까지 진척되지 못해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광관원 3명은 1980년 석방되기까지 5년 가까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북한은 교환협상이 중단된 이후 우리 측 공관원들에게
외교관 납북을 대비한 가족지원 대책까지 마련하면서
전향서 쓰고 평양으로 갈 것을 강압적으로 강요하지만
다시는 가족도 만날 수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안감속에서도
이대용공사를 포함한 공관원들은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고 합니다.
한편 한국 외무부는 자국의 외교관들의 석방과 송환을 위하여
미국, 프랑스, 일본, 스웨덴, 유엔, 유엔 나민고등판무관(UNHCR)
국제적십자위원회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해 노력했는데
미국등 동맹 우방국들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할 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미국은 자국인 철수 당시에도 한국인 철수를 위해 미 해병대를
파병해 달라는 한국요청을 거부하고 잔류 한국인들의 구출에 대해서는
'일본, 프랑스 대사관에 알아보라'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전쟁을 도와준 파병국을 홀대했다는 국제적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방관적인 태도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 정부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곳은 스웨덴.
스웨덴은 외부차관등이 직접 나서서 한국인 공관원들에 대한 석방 중재교섭에
나서는데, 1976년 5월 23일 베트남 정부와 첫 접촉 이후 4년 만인
1980년 4월 11일 석방되어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도는 감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대용 공사는 황해도 금천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7기 졸업생으로
1950년 6.25 전쟁에서 한국군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를 이끈 군 지휘관출신이기도 한데
젊은시절을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셨던 이대용 공사는
지난 2017년 숙환으로 별세하셨다고 하셨고
안희완 2등 서기관님은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외대 베트남어 교수가 되셨으며
대한민국과 통일 베트남이 공식 수교 후, 베트남 정부로부터
베트남 대한민국 교류에 이바지한 공로로 베트남 국가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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