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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기록

꼬꼬무, 성수대교 붕괴 재조명 예고된 추락

by 와우짱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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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당시 성수대교 모습(출처:연합뉴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11월 24일은 월드컵 중계로 휴방,

한 쥐 쉬고 12월1일 방송되며
이번에 들려줄 그날 이야기는
1994년 10월 21일 대한민국을 들썩이게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다룬다. 오전 7시 40분 다른날과 다름없이 아침 출근과 등교를 하던 사람들이 다리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사고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부실공사임이 밝혀져 더욱 큰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주었던 인재사고이다.

 

#무너진 다리와 49명의 사상자

성수대교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길이 1천161미터 너비 35미터의 8차선 다리이다.

한강 11번째 다리고 1977년 4월 착공, 1979년 10월 16일에 준공되었다.

1994년 10월 21일 사건이 일어나가 7시간전 0시즈음 부터

다리에서 이상징후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0시 30분쯤 택시기사 남씨는

성수대교를 지나다가 철판을 덮어놓은 부분에서 '우드득' 소리를 듣게된다.
새벽 2시 30분쯤, 성수대교를 통과한 또다른 택시기사 이씨는

교각 네번째 이음새부분이 크게 벌어진것을 목격하고

이곳을 지나치자 마자 가로세로 2m

철판이 상판위에 덮여 있는 것을 목격하는데

이때 이미 이음새에 균열이 생겨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신고도 잇따랐지만 서울시는 교량 진입을 통제하거나

긴급조치를 하는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추후 밝혀졌다.

 

오전 7시 40분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이진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이 결국 붕괴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힘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당시 사고 부분을 달리던 승용차 2대가 철골구조물과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서울경찰청 제 3기동대 40중대 소소 의경 11명을 태운 경찰 승합차도

붕괴지점에 있다가 함께 추락했다. 다행히 승용차와 승합차는 상판과 함께 떨어지며 차체 손상이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달려오던 버스는 달랐다.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 기사인 유씨는 다리 붕괴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때문에 버스의 앞 부분은 붕괴지점 밖으로 밀려났고

뒷바퀴는 붕괴부분에 걸친채로 아슬아슬하게 정지했다가

차체가 뒤집히면서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버스는 먼저 떨어진 상판위로 강하게 충돌하면서,

차체가 심하게 찢기고 찌그러지면서 많은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얼마후 의경들이 정신을 차리고 차밖으로 나오면서

버스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함께 힘썼다.

먼저 승합차에 있던 스페어 타이어를 떼어내 강물위로 떨어진 피해자들에게

던져 물속에 빠진 시민들이 타이어를 붙잡고 상판위로 대피할 수 있게 하였고
의경 일부는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승객들을 끄집어 냈다.

수영이 가능한 3명은 기동복을 벗어 임시밧줄을 만들고

물속에 뛰어들어 익사직전에 시민들도 구했다.

이들이 구해낸 시민은 모두 16명이고

이중 11명은 안타깝게도 병원으로 이송중 숨져버리고 말았다.
다리 붕괴로 버스 1대 승합차1대 승용차 4대등 차량 6대가 추락

32명(남16명/여16명)이 사망, 17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사상자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16번 버스에서 나왔다.

운전기사와 탑승자 31명중 2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사고 당시 시간이 출근과 등교시간이라 직장인과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버스에 타고있던 무학여중 1명과 무학여고 8명등 한 학교에서 9명의 학생들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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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부른 최악의 인재사고

성수대교는 총체적인 부실덩어리였다.

건설 분야에 만연되어 있던 부실공사와 부실감리, 안전 검사 미흡이 집중적으로 폭로되었다.

당국의 근시안적 설계와 형식적인 안전점검과 관리가 빚은

최악의 인재였다.

최초 3년으로 계획된 공사기간이 2년 6개월로 단축되면서

다리 상판을 떠받치는 철골구조물의 용접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용접두께도 10mm이상 돼야 하는데 8mm밖에 되지 않았으며

볼트 연결핀도 부실했던 것으로 이런 부실시공으로 인해 차량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종잇장 처럼 구겨지고 무너져 내린것이었다.

당국의 관리감독도 허점투성이었다.

통과하중보다 많은 이용차량수가 급증했음에도 정밀안점점검등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방치해왔다.

더 큰 분노는 붕괴책을 물어

시공사 동아건설과 서울시 관계자등 17명을 구속기소했지만
현장소장 1명에게 무죄를 선고,

나머지 16명은 유죄는 인정했지만 집행유예를 선고해

전원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대형참사를 일으키고도 엄격한 잣대로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떠나간 피해자들과 남겨진 유족들만이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성수대교는 1995년 4월부터 현대건설이 다시 짓기 시작해

1997년 7월 완공되어 현재까지 사용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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